All ideas streamlined into a single flow of creativity. Smiltė.

#시집 #가난 #창고 #시동생 #교산동 #샘재 #지장물 #늙은이 #고골 #LH #나이 #쌀밥 #사람 #가마

하남시청 앞 “하남교산지구 고향지키기 주민대책위원회” 천막에서 

대책위원회 여성부위원장 이언년님과 인터뷰,

2022년 6월 19일

  

우리 아버님이 젊어서 남 머슴도 살고 장작도 패고 그러셨대. 

삼판, 산에 가서 장작을 패는 거를 삼판이라 그래. 

이제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더 받고 그랬겠지? 

그런 걸 해서 돈을 모아서 땅을 장만하셨다고 그러더라고. 

그 땅에서 다 같이 농사를 짓다가 우리 대에 와서 거기 창고를 지은 거지. 

우리 아버님은 몰라. 농사만 짓다 돌아가셨어. 

어느 날 보니까 동네에서 누가 창고를 지어서 세를 주고 뭐 돈을 받는대. 

그래서 보니까 예를 들어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면 쌀이, 

예를 들어 일 년에 열 가마가 나온다 쳐. 거기다 창고를 지으면 일 년에 뭐, 백 가마가 나온대. 그걸 그러니까 세 받는 걸 쌀로 치면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창고를 지은 거지. 

그런데 어느 때인가 딱 막혔어. 창고도 못 짓고 땅이 그린벨트라고 벌금을 매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세를 받아서 벌금을 내고 은행 이자를 내도 농사지어서 먹는 거보다 나아. 

열 번, 백 번 났지. 그래서 다 부자가 됐다고 그러는 거야. 

말하자면 창고 지어서. 그래서 말이 있잖아.

 ‘어유, 땅 파던 놈이 창고 몇 개 짓더니 골프채 지고 자가용 타고 골프 치러 다닌다.’고들 해. 

돈이 뭐 몇천만 원씩 들어오니까. 

그렇게 변해 버린 거야. 그러다가 또 확 다 변해 버린 거지. 이제 다 뺏긴 거야.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언년 내가 그러니까 60년 전에 아니, 59년 전에 과천이 고향이었어요. 과천이 고향인데 거기서 하남으로 시집을 왔어요. 하남으로 시집을 와서 지금 수용된 교산, 여기로. 그래서 이제 시집을 와서 거기서 삼 남매를 낳고 살았는데… 아, 맞다. 내 소개를 해야 하는구나?

Q. 지금 하고 계신 거니까 괜찮아요.

이언년 그래서 여기 와서 살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 지금 현 나이는 팔십이야. 팔십. 생일이 7월 초하루예요. 

이언년 내가 팔십이라 여기 교산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보고 들은 게 많아요. 하남에 와서 살면서 가난한 시절에 아주 가난하게 살다가 나중에 조금 형편이 피면서 봉사도 좀 하고. 지금까지도 적십자 봉사를 하고 있어.

Q. 네. 맞아요. 지역에서 봉사단체 활동을 많이 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이언년 하남시 여성단체 협의회장을 6년 했고, 또 향교(하남시 소재 “광주향교”)회 제사 지내는 단체를 “여성유도회”라 그래. 유도회가 운동하는 그 유도가 아니고 선비 유(儒)자야. 그래서 하남 여성유도회에 회장을 12년을 했어. 시집와선 고생하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 

Q. 처음 오셨을 때는 6.25 전쟁이 끝난 후였을까요?

이언년 그럼. 그때 전쟁은 끝났지. 근데 그때도 전깃불이 안 들어왔어.

Q. 교산에서 어느 동네에 사신 건가요? 

이언년 동은 교산동이야. 교산동인데 그 동네를 갖다 샘재라고 해. 교산동이면서 이제 그때는 경기도 동부면이었고, 이제는 교산동, 샘재 마을.

Q. 과천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시집을 오게 되셨나요? 

이언년 우리 작은오빠하고 우리 남편인 이영범 씨하고 군대 동기야. 군대 동기였는데 우리 남편이 얌전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그래. 나는 좀 덜렁대는데 우리 작은오빠가 “아휴, 저렇게 덜렁대는 거는” 그전에 집에서는 나를 복순이라고 불렀어. “저 덜렁대는 복순이는 얌전한 신랑을 찾아줘야지.” 하고 그 군대 동기가 착해서 마누라 밥은 안 굶기겠다 싶다고 나를 작은오빠가 중매했어. 작은오빠는 벌써 돌아가셨어. 우리 남편은 아직 건강하시고. 남편하고 나하고 나이 차가 많아요. 일곱 살이 더 많아. 남편은 지금 87세야. 

이언년 내 나이는 80이고 생일은 7월 초. 7월 초하루. 근데 여자가 7월 초하루가 생일이면 드시다 그랬어. 뭐 옛날 노인네들 말이 그랬어. 활동력이 많다고. 그걸 옛날에는 드시다 그래. 

Q. 그래서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봉사도 하시고 요즘으로는 좋은 성격이신데요. 

이언년 그런지도 모르지. 

이언년 암튼 그래서 내 나이가 여덟 살 때 6·25가 났어요. 6·25가 터져서 아주 힘들었어. 아주 정말 보릿고개야. 밥도 없어 못 먹을 때야. 

근데 그 시절에 엄마가, 내가 이렇게 보면 다락에 뭐가 매달려 있어. 그럼 “엄마, 저건 뭐야?” 그러면 그게 칠월 초하루, 나 생일날 쌀밥 한 그릇 해주려고 엄마가 쌀을 요만큼 담아서 저기다 걸어놓은 거야. 그 시절 그땐 다 어려웠으니까. 

이언년 그땐 과천에도 전깃불이 없었고 여기나 저기나 전깃불도 없어. 지금 광주 다니는 도로 있잖아? 이 도로도 없었고 다 비포장도로고 자갈길, 흙길밖에 없고. 그랬을 적에 내가 여기로 시집을 와서 그때서부터 이제 농사를 지었지. 나가서 뭐 조밭도 매고 콩밭도 매고 이제 그렇지. 그러면서 삼 남매를 낳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시고. 시집살이도 많이 했어. 내가 시집을 좀 일찍 왔어요. 스무 살에 시집와서 스물한 살에 아들을 낳았어. 시어머니한테 구박 많이 받았지. 일을 잘 못 한다고. 그런데 나중에 돌아가실 무렵에는 일 잘한다고 하셨어. 

이언년 그렇게 살다가 늙었는데 이제 그러자 땅을 수용당한 거야. 그 땅이 조상님 땅이야.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거기다 창고 짓고 창고에서 세놓고 세 받아먹고 살았어. 

이언년 또 세를 놓고 세 받아서 애들 공부 가르치고 우리 먹고살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 싹 다 수용되니까 너무 허무한 거지. 그렇다고 땅값을 제대로 쳐주는 것도 아니고… 근데 여기 땅이 LH(한국토지주택공사)하고 경기도공(경기주택도시공사)하고 반이 잘렸어. 근데 경기도공은 그래도 조금 부드러워. 조금 더 쳐줘. 그런데 LH는 아예 돈을 안 쳐줘. 

Q. 같은 교산지구인데도 보상의 주체가 다른 걸까요?

이언년 그게 그러니까 한 동네 사람이어도 받는 사람마다 달라. 도공은 좀 부드럽고 LH는 야박해. 데모하고 싸움이 나고 그래도 소용없어. 우리가 세종시에 데모하러 갔어도 소용이 없고 안 돼. 세종만 갔나 광화문으로 가고 강원도를 안 갔나. 아유, 나 진짜 데모만 생각하면… 하여튼 고생 많이 했어. 

Q. 집회에 가면 LH 관계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 

이언년 그래도 쫓아가면, 그 뭐 차장이라던 가는 나오지. 근데 높은 사람은 안 나오지. 내가 또 여성 부위원장이니까 나하고 또 뭐 이렇게 사무국장이랑 또 몇 명, 한 대여섯 명만 들어오래. 다 못 들어오게 하지. 들어가서 대화하면 뭐 알았다고, 알았다고 해놓고는 뭐, 그게 지켜지기 힘들어. 

Q. 공사 측과 합의를 본 사항에 대해서 지켜진 부분이 있었나요?

이언년 조금은 있지. 아무래도 대면하면… 조금은 있어. 그런데 아직까지 지장물이 안 나왔는데, 말은 무슨 뭐 이렇게 땅을 조금 주니, 아파트를 주니 하면서 말은 그렇게 했거든. 근데 그것도 거저 주는 게 아니야. 돈을 내야 해. 입주권을 준다는 얘기지. 근데 아직 그것도 안 정해졌어.

Q. 토지는 지금 보상이 끝났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언년 토지 보상은 끝났지. 땅은 다 끝났어. 그런데 주택에 대한 건 아니야. 그건 지상 지장물이라고 하고. 집이라든가 창고라든가 하우스라던가 그런 게 지금 안 정해졌어. 아직까지는 얼마 준다, 얼마 준다, 뭐 말은 떠도는데 실제로는 모르겠어. 이제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어. 지금 찾아가라고 몇 집은 사람이 나와서 말했대. 그런데 그게 맞지가 않더라고. 

Q. 혹시 정해진 보상금에 대해서는 이의 신청이 가능한가요?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조정 신청을 한다던가요.

이언년 억울하면 변호사 사서 소송하는 거야. 근데 뭐 그걸 해도 큰 차이는 없다는데, 나도 지금 지장물 보상이 나왔어. 그런데 너무 억울해서 지금 변호사 사서 소송을 할지 지금 생각 중이야. 나온 지 한 삼 일 되거든. 땅을 너무 값을 안 쳐줘서 지장물이라도 많이 쳐줬으면 했는데, 그것도 또 아니네.

이언년 조상님 땅에서 살다가 이렇게 다 뺏기면서… 여기 사람들 중에는 보상받은 걸로 뭘 조금 샀는데 사기당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결국은 조상님 땅만 날아가고 재산만 없어지고 뭐 그야말로 거지 된다, 그러나?

이언년 사기당하고 잘못 사고 그런 경우도 많고… 다 그런 건 아니야. 또 좋은 물건 사서 잘 된 사람도 있고. 그러기 전에… 옛날에는 딸들 아무것도 안 줬거든? 시집을 갔으니까. 근데 이제 수용된 땅이 딸들 입장에서 자기들이 어려서 살던 집이지. 말하자면 그게 그렇지. 수용당하고 보상받으면 시동생들이 달라고 해서 싸움이 나고 그래. 지금 소송 걸린 집이 많아. 

이언년 그리고 여기 땅 가지고 있는 사람은 농협에 빚 없는 사람이 없거든? 대부분이 있다고 봐야 해. 농협 빚 갚고 세금 내고 나면 별로 안 남아. 남는 게 없어. 그런데 또 그걸 아랑곳없이 시누나, 시동생대로 달라고 해. “그거 네가 장만한 거 아니잖냐, 조상 때부터 내려온 게 아니냐.” 해서 달라면 할 말이 없어. 법에 가도 그게 이겨. 내가 산 게 아니니까. 조상님한테 내려온 거니까. 그래서 아주 땅 뺏기고 돈도 잃고 이제 여기가 아주 골치 아픈 고장이 돼버렸어요. 슬프고 …

Q. 너무 복잡해졌어요. 제가 2019년에 여기 천막농성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상황이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 같아요. 

이언년 아주 아프지. 아프고 슬퍼. 

그때는 그래도 이제 막 들어간다고 하니까는 이제 뭐 그래도 얼마라도 쳐주겠지, 했는데 지금은 그때하고 상황이 너무 다르지. 

이언년 아마 대부분이 슬픈 지경일 거야. 갈 곳도 없고. 땅이 많고 뭐 그런 사람은 괜찮아. 뭐 좀 떼어주고 그런 사람은 괜찮은데 그저 조금 받은 사람들은 진짜 세금 내고 농협 빚 갚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데, 또 시동생들은 손을 벌려서 다들 싸우고, 소송하고 문제가 심각해. 

Q. 예전에 제가 인터뷰했을 때도 보상이나 세금 문제 등 이런저런 걱정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해질 줄은 예상 못 했던 것 같아요. 

이언년 이게 이제 닥친 거야. 

Q. 너무 충격적이에요.

이언년 아이, 슬프지. 그래서 이 천막을 아직도 못 치우고 이러고 있는 거야. 이렇게 토요일, 일요일까지도 우리가 여기 있는 거야. 

Q. 그럼 이주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이언년  그게 기약이 없어요. LH공사나 이런 데서는 뭐 “선이주 후대책”이라나? 원주민은 원주민끼리 살게 해준다는 말도 했었어. 

Q. 원주민분들이 사시려면 땅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하남에는 땅이 없지 않나요? 

이언년  거의 없어. 그리고 뭐 여기서 넓게 살던 사람들이 임대주택 뭐 이십 평, 열다섯 평 그런 데 가서 어떻게 사냐고. 비참한 거야. 지금 한마디로 비참해.

Q. 다들 너무나 힘들어지셨어요. 

이언년 난리야 난리. 내가 아는 사람들도 소송 걸린 사람이 많고. 

Q. 더 큰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라면 체력도 있고 여기서 살다가 또 새로운 곳에 가서도 적응할 수 있다면 교산 원주민의 대다수는 고령층이 많아서요.

이언년 응. 그런데 다 노인이야. 여긴 다 늙은이들이야.

젊은 사람들은 나가서 살고 거의 노인들이 이걸 지키고 있었어. 그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집에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지. 그런데 이게 뺏기니까, 이 자식 저 자식 다 와서 따지고 다 내줘야 하지, 세금을 내야지, 빚은 갚아야지. 아주 진퇴양난이야. 진퇴양난 아주. 

Q. 아주 예전에 교산동은 어떤 곳이었나요?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는 어땠나요? 

이언년 가난했어, 아주. 정말 너무너무 보릿고개였어. 이제는 얘기해도 모르겠지만 …

나도 십오 년은 시장에 나가서 농사지은 거 팔고, 가난하게 살고. 그땐 다 가난했어. 진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아. 보리밥도 없어. 얼마나 가난했는지, 내가 지금 우리 아들, 첫애를 임신했는데 쌀밥을 먹고 싶어도 못 먹어. 어디 가서 쌀밥을 먹어봐? 배불리도 못 먹는 판인데.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어. 

Q. 지금은 다들 여유 있게 사셔서 옛날에도 부자 동네인 줄 알았어요. 

이언년  너무 가난했어. 농사지어서 참외 열리면 서울 가서 팔고, 또 부추, 오이 그런 걸 키워다 따서 이렇게 묶어서 저 서울 중앙시장에 갖다 팔고. 그래서 먹고살았지. 농사지어서.

Q. 서울 중앙시장이면 어디인가요? 

이언년 행당동이지. 거기까지 가. 맨날 그 중앙시장 간다고들 참외고 부추고 머리에 이고 가셨어. 그 돈으로다 비료도 사야 하고, 먹고 살고, 자식들 공부 가르쳐야 되잖아.

Q. 농사짓고 사시다가 토지에 창고를 짓게 되신 건 언제부터였나요? 

이언년 한 이십 년 전에?

이언년 내가 여기 60년째거든, 그러니까 25년 전에 창고를 지어서 이 동네 사람들이 세를 주기 시작했어. 서울 사람들이 나와서 세를 얻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세를 놓기 시작해서 좀 살게 된 거야. 

Q.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요. 

이언년  얼마 안 됐지.

Q. 그러니까 89년도에 하남시가 생길 무렵에 변화가 시작된 걸까요?

이언년  거의 그때지. 하남시로 바뀌면서부터 좀 나아진 거 같아.

Q. 그런 거군요. 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이언년  다른 거 보다도 지금 생각나는 건… 우물도 동네에 딱 하나만 있었어. 그 우물에서 물 길어다 밥해 먹고. 뭐 고생스러운 거는 말도 못 했지.

Q. 과천에서 사실 때와는 아주 달랐나요?

이언년  과천에 우리 집은, 우리 친정아버지가 관악산에 절을 지으신 목수였어. 아마 지금 살아계셨으면 인간문화재가 되셨을 거야. 지금은 돌아가셔서… 아무튼 그렇게 절도 짓는 분이셔서 그래도 나는 과천에서는 쌀밥 먹고 살았지, 친청에서는. 그런데 여기 오니까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어. 

 Q. 조금 슬프지 않으셨어요, 처음에는요?

이언년 몇 번은… 너무 못사니까 첫애 낳고 몇 번 친정으로 가려고 했어, 한 세 번은. 

Q. 그런데 어떻게 안 가셨어요? 

이언년 애가 들어서 생겼는데, 그 애들 놔두고는 못 가겠더라고. 그런데 그 시절에 나뿐만이 아니라 내 또래들, 시집온 사람들, 이 여자나 저 여자나 마을이 다 그랬어. 다 그렇게 고생했어. 다 가난해서, 정말 아… 그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네. 

그때 연탄이 어디 있어? 아궁이에 불 때서 밥해 먹어야 하고, 물 길어다 먹어야 하고, 온 동네가 우물 하나에서 기어다 먹고, 추운 겨울이면 미쳐, 아주. 

텔레비전에서 보면 못 사는 나라 있잖아? 물 길어가고 뭐 그런 나라들. 그리고 요새 왜 우크라이나라 그러나? 그 전쟁 나고 폭격 맞고 그 왜 어린이들 죽고. 그러면 난 안 봐. 텔레비전 돌려. 내가 겪었으니까… 안 겪은 사람들은 뭔 난리가 저렇게 나는가 싶겠지만 나는 못 봐. 우리는 겪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전쟁 때 우리 아버지하고 과천서 수원까지 가는데, 폭격을 해서 사람들이 막 죽어. 그래서 우리가 송장 넘어서 가고… 그렇게 겪은 거야. 그게 여덟 살이라 기억이 나. 막 송장을 넘어갔어, 아버지하고. 아버지는 우리 동생을 지게에다 이불, 광목 이불을 포개서 쌓아 놓고 그 위에 우리 동생을 얹어놓고. 우리 동생은 내 밑에 네 살인데, 이불 위에다가 앉혀놓고 지게를 붙잡으라고 그러고. 아버지가 지고 가시고, 나는 걸어가고 엄마는 또 보따리 이고 가고. 난 여덟 살이니까 걸어갔어. 

Q. 피란 가신 건가요?

이언년 피란 가는 거야. 저기 저 바란까지 가서 수원 지지대국을 넘어서. 

Q. 바란이 지금은 어딜까요?

이언년 바란…? 송탄.

이언년 동탄. 바란이라고 그랬어, 옛날에.

Q. 거기가 더 안전했나요?

이언년 거기도 안전한 게 아니야. 거기 집안 아주머니가 사니까 내려간 거야.

가니까 사람이 꽉 차 가지고, 저 헛간에 가서 멍석 깔고 자고 사람이 다 몰려 내려가서, 말도 못 해요. 피란 가서 몰리니까 그렇게 사람이 많더라고.

Q. 예전의 교산동은 마을도 더 크고 사람도 더 많았나요? 

이언년  교산? 교산은 지금 그대로야, 그대로. 조금 크긴 했지. 그래도 뭐 몇 집 누구네 집, 누구네 집 그런 건 다 알았어. 그러다 좀 형편이 나아지고, 가을이면 농사지어서 쌀을 타작을 해. 그러고 나면 고사를 지내. 고사 지낸 떡을 동네에서 다 나눠 먹었는데, 누가 누가 만들었는지 아니까 또 나누어 먹고 그랬지. 

이언년  거의 다 그대로야. 말하자면 서울 사람들이 와서 세 들어 살고 그런 것만 조금 달라진 거지 뭐. 옛날 집들은 그대로고. 서울 사람들이 세 들어서 창고 지어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 창고로 쓰는 사람도 있고 그런 거지. 우리 위로 나이 먹은 사람들은 거의 죽고, 우리 큰어머니, 큰아버지, 우리 어머니도 다 돌아가시고 뭐 형님, 아주버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래서 집안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아까 팔십칠 살이라고 그랬지? 할아버지하고 내가 고참이야. 위에는 다 돌아가셨어. 

Q. 마지막으로 교산을 지키는 세대가 되셨네요.

이언년 우리가 여기에 마지막까지 있다가 끝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여기로 시집을 왔고 우리 양반은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 동부초등학교 다니고. 여기 뭐 중학교나 있었어? 천호동인가 어디로 고등학교 다니고. 그래도 지금도 동부초등학교가 여기 있잖아. 여기서 살다가 팔십일곱 살이 된 거야. 

Q. 이곳에서만 87년을 사시다가…

이언년 아버님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농사짓는 밭에서 같이 농사짓다가 이제 다 창고를 지어서 또 세도 받아먹고 그러다가 이제 다 날아가 버린 거야. 그렇게 된 거야. 

이언년 우리 아버님이 젊어서 남 머슴도 살고 장작도 패고 그러셨대. 삼판, 산에 가서 장작을 패는 거를 삼판이라 그래. 이제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더 받고 그랬겠지? 그런 걸 해서 돈을 모아서 땅을 장만하셨다고 그러더라고. 그 땅에서 다 같이 농사를 짓다가 우리 대에 와서 거기 창고를 지은 거지. 우리 아버님은 몰라. 농사만 짓다 돌아가셨어. 

어느 날 보니까 동네에서 누가 창고를 지어서 세를 주고 뭐 돈을 받는대. 그래서 보니까 예를 들어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면 쌀이, 예를 들어 일 년에 열 가마가 나온다 쳐. 거기다 창고를 지으면 일 년에 뭐, 백 가마가 나온대. 그걸 그러니까 세 받는 걸 쌀로 치면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창고를 지은 거지. 옛날에 손영채 시장이 있을 적부터 그렇게 변한 거야. 

그런데 어느 때인가 딱 막혔어. 창고도 못 짓고 땅이 그린벨트라고 벌금을 매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세를 받아서 벌금을 내고 은행 이자를 내도 농사지어서 먹는 거보다 나아. 열 번, 백 번 났지. 그래서 다 부자가 됐다고 그러는 거야. 말하자면 창고 지어서. 그래서 말이 있잖아. ‘어유, 땅 파던 놈이 창고 몇 개 짓더니 골프채 지고 자가용 타고 골프 치러 다닌다.’고들 해. 돈이 뭐 몇천만 원씩 들어오니까. 그렇게 변해 버린 거야. 그러다가 또 확 다 변해 버린 거지. 이제 다 뺏긴 거야. 

Q. 한국 현대사를 듣는 것 같아요. 정세나 판도가 변해가는 걸 땅을 통해 겪어내시는 분들이 많다는 게요. 

이언년 그래도 아직까진 다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아. 창고도 아직 있고, 안 헐리고. 근데 지장물 보상해 주면 이제 때려 부수거든. 그럼 얼른 나가야 해. 지금은 내 집에서 살지만 이제 정말 슬픈 일만 남았어. 이제 앞으로야. 기가 막힐 일은 앞으로 남았어. 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지. 세금 내고 이자 내고 하면 뺏기는 거고. 나가긴 해야겠지. 계속 살 수가 있어?

Q. 그래도 이주까지 2년은 남지 않았을까요? 

이언년 글쎄, 생각에 2년도 안 걸릴 것 같아. 왜냐하면 요새 지장물 찾아가라고 쪽지가 나왔거든. 

이언년 아니, 처음에 신도시에 들어간다고 했을 땐 그래도 돈을 좀 쳐주면 어디 다른 데 가서 살아야지 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또 돈이 나온다고 해도 여기저기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동생들이 와서 나누자고 하고. 그렇게 싸우다가 재판 걸린 집이 한두 집인 줄 알아? 지금 재판 걸린 집이 많아. 한 집 건너 재판 걸렸어. 형제끼리 의리도 다 끊어지고 그렇지. 옛날에는 다 같이 제사 지내러 오고 그랬는데 이젠 시동생들도 제사도 안 오고. 돈 때문에 서로 싸우고… 

Q. 예전에 인터뷰했을 때는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함께 제사도 지내고 사이가 좋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언년 이제 없어, 없어졌어. 세상에, 다 파괴됐어. 아주 파괴됐지.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할 거야.

Q. 원래는 교산에서 기억이나 남기고 싶은 추억 등에 관해 질문드리고 기록을 남기려고 한 건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이언년 그래, 이제 이렇게 쫓겨나는 기억밖에 안 나. 추억이라면, 나 시집와서 고생한 거. 그때는 다 고생했으니까. 

그런데 뭐… 고사 떡 해서 다 나누어 먹는 거나. 가을에 농사를 지으면 추수하고 나서 고사를 지내. 신에게 고맙다는 뜻이야. 신께 고맙다는 뜻으로 집마다 다 해. 그럼 집마다 떡을 돌리는데 누가 빠졌나 보면서 그런 것도 다 챙겼지. 

그리고 제사를 지내면 동네에 나이 많으신 사람들이 있잖아? 새댁이 제사를 지내면 탕국하고 밥하고 해서 노인들 집에 가져가. 밤에 이거 드시라고.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셔.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했어.

Q. 그래도 예전에는 노인분들이 외롭지 않게 가족과 마을이 다 같이 챙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언년 예를 들어서 나이 많은 사람이 집에 있으면 조카라던지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도 들려서 “요즘 진지는 잘 잡수시나요?” 묻고 가. 들어와 얘기라도 하고 들여다보지. 나이 많다고.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

Q. 그래도 노인분들이 살던 곳에서 익숙하게 잘 지내실 수 있었는데 이주하게 되면 모든 게 다 낯설어질 것 같아요. 

이언년 오히려 처음 발표 났을 때만 해도 어떻게 되는 거야? 이랬는데 지금은 너무 처량하고 기가 막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보상이라도 많으면 어디든 아파트 사서 가면 되겠지만 돈이 없거든. 돈 받았어도 세금 내고. 은행 빚 없는 사람 없거든? 은행 빚 갚아 세금 내고. 그리고 자식 없는 사람이 없거든? 자식 주고 동생들 주고 시동생들 주고 그러면 없어. 거의 다 그렇다고 봐야 해. 안 그런 사람이 얼마 없어. 땅이 아주 많아서 보상금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 손꼽힐 거야. 

이언년 이제 월세라도 가야지, 어떡해? 땅값을 받아서 다 썼어. 지장물 나온 거라도 받아서 어디 월세라도 가야지. 

Q. 이주하시면 꼭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을까요?

이언년 근데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가 없어. 예를 들어서 내가 쓰던 다라이(대야)라든가 맷돌이라든가 항아리라든가, 어디로 가져가겠어? 다 버려야지. 나는 다 가져가고 싶어. 내가 쓰고 있는 항아리도 맷돌도 가져가고 싶고.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가 없어. 다 버려야 해. 

Q. 어머님께 교산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이언년 내가 시집오니까 저기 선법사라고 있었어. 지금도 있어. 그 절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뭐라 그럴까? 아주 아늑해. 아늑해서 형제들이 모여 앉는 따뜻한 아랫목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내가 시집올 때 세타(스웨터)를 하나 가져왔는데 그 세타를 사람들이 빌리러 와. 신장(당시 광주 동부면 시내) 간다고 세타를 빌리러 와. 그럼 빌려주고 그렇게 정겨웠지.

Q. 예쁘게 입고 시내에 가려고 빌리시는 건가요?

이언년 그렇지. 그땐 다들 옷이 남루하니까. 좀 좋은 걸로 겉옷을 빌려 입고 가려고. 그렇게 어려웠다니까.

Q. 어려운 시절에도 작은 것을 나누는 마음이 너무 따뜻하네요.

이언년 총각들이 선보러 가면 양복 있는 집에서 양복 빌려 입고 선보러 가고 그랬어. 왜 그걸 아는가 하면, 우리 남편도 선보러 왔을 때 양복 코트가 있었거든? 근데 시집와 보니까 그게 없어. 그래서 그거 어디 갔냐고 하니까 뭐 얼버무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쓰봉(바지)은 건넛마을 사람한테 빌려 입고 코트는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이지? 매형한테 빌려 입고 장가가려고 나온 거야. 

그렇게 가난했어. 근데 그게 우리만 가난한 게 아니라 다 가난했는데, 특히 우리 집은 더 가난했던 것 같아. 그렇게 가난했지만 정이 있어. 이 마을 이 동네는. 아주버님, 시동생, 조카들 모두 정이 있었지. 

Q.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이언년 그러니까 여기는 엄마 품속 같은 마을이야. 이제 누구네 집, 누구네 집 하면서 다 알고 살던 것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처음에 신도시 발표 났을 때는 그때만 해도 다들 괜찮았지. 원래 그렇듯 다들 살던 대로 살았어. 근데 지금은 다들 악만 남고… 슬프고… 

Q. 시간이 지나서 이곳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래도 좀 더 어떻게 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실까요? 

이언년 그렇지, 어떻게 될까 생각은 하는데…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이제 이 나이 먹고 나가면 그동안 친한 친구, 동네 사람으로 맨날 보던 사람들이 헤어져야 해. 이웃으로 갈 순 없잖아. 그게 슬프다는 거야. 옛날에는 헤어지면 그만이고 그랬지. 근데 그래서 더 슬프다고. 

나이 먹고 그래도 늙은이끼리 통하는 말이 있잖아. 그랬는데 이제 다 흩어져서… 뭐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은 들을 순 있겠지. 전화가 있으니까.

이언년 그러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만 고생이지. 오히려 젊은이들은 부모 올 때 돈 받고 좋아라 해. 젊은이들은 미리 서울 살고 있는데 땅이 보상 들어가서 받았으니 좋아라 하지. 이제 나이 먹은 늙은이들이 슬프지. 

Q. 교산에서 평생을 사신 고령층의 원주민분들이 가장 피해를 보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이언년 우리는 아직 두 늙은이가 있잖아. 다른 데 가기 싫으니까 이 근방에서 살고 싶어. 낯선 타지는 진짜 가기 싫어. 그래도 이런 일과 상관없이 그냥 있으면서 나는 날마다 감사하다고 생각해. 이 나이에 지금도 적십자 봉사도 하고 운동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지. 나는 셋방을 살아도 이 하남 근처에서 살고 싶어. 하남에서 여기 떠나기는 싫어. 이 근처에서 살아야지. 

Q. 지금까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