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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춘궁동 궁안마을에서 고골방앗간을 운영하시는 김연분 사장님과의 인터뷰,

2022년 6월 3일 춘궁동 석천재에서.

 

 그때 가래떡 한 말 하는 게 지금은 삼만 원이야. 

그때는 백 원이었어. 

그때 백 원 할 때 우리가 이 땅을 산 거야. 

한 평에 구백 원씩 산 거야.

가래떡 아홉 말만 하면 한 평을 샀는데, 

지금은 열 가마를 해도 땅을 못 사. 땅이 천만 원씩 그러잖아. 

고골은 땅값이 유난히 비싸. 

그렇게 세월이 흐른 거야.

 

Q. 처음에 교산에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김연분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요, 이 동네에서. 친정이 여기야. 여기에 오빠들이 다 계셔. 나는 여기가 고향이고. 학교도 여기 고골초등학교를 다니고. 태어난 게 여기야. 

김연분  음… 내가 어릴 때 9살에 홍역을 했대. 요새는 마마라고 말하면 안 되지? 지금 그걸 장티푸스라고 하나? 옛날에는 주사를 안 놓아주고, 예방 접종을 못 하고 그랬어. 그러다가 우리 친정엄마가 아들 둘 낳고, 나를 낳고, 또 아들 둘을 나았대. 우리가 김해 김씨인데 내가, 우리가 딸이 귀했어. 그래서 딸이 태어나서 우리 할머니가 좋아서 내가 걸을 때까지 업고 다니셨대. 우리 아버지는 옛날에, 지금 같으면 군인 갔다 오면 예비군 훈련이 있잖아? 우리 아버지는 군인을 갔다 오셔서 또 훈련받으러 가셨다가 병이 나서 서른셋에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도 서른셋 동갑인데, 우리 엄마가 서른셋에 혼자 되신 거야. 그러고는 이제 맨 밑으로 남동생이 죽고… 지금 우리 오빠가 여든넷이야. 큰오빠가 살았으면 여든일곱이야. 근데 제일 큰오빠가 홍역에 걸려서 돌아가고 내 동생이 있고. 오빤 이 동네에 있고, 우리 동생은 저 고덕동 그라시움이라나… 새 아파트, 거기서 살아.

Q. 이곳 춘궁동에서 방앗간을 몇 년 정도 하셨어요?

김연분  저 밑에 방앗간 했던 자리에 우리 아들이 비석을 해놨어. 1977년이라나? 그때 방앗간을 시작한 거야.

그 방앗간에서 낳은 딸이 지금 쉰두 살이야. 미국에 살아, 지금. 이제 곧 또 온대. 여기에 6개월 있다가 2월 20일에 갔는데 이제 또 온대요, 아들을 데리고. 아들이 대학 가느라고 작년에 못 와서, 아들이 오고 싶어서 한다고. 

Q. 방앗간에서 사진을 보니까 예전 집 사진이 있더라고요.

김연분  그때는 슬레이트로 지은 집인데 그 집은 또 그 슬레이트를 헐어버리고 다시 짓고 옥상까지 만들었잖아. 그 사진은 내가 우연히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그렇게 액자로 만들어 놓은 거야, 내가 저기 사진관에 가서. 그 미국에 사는 쉰두 살 먹은 딸을 거기서 낳았으니 엄청 오래됐지. 59년이 돼. 

Q. 지금 50년 넘게 여기서 방앗간을 하고 계시는 거군요. 

김연분  한 38년을 하다가 우리 집 할아버지가 디스크가 걸렸어요. 그래서 나 혼자는 할 수가 없으니까 세를 줬던 거지. 그 세를 준 사람이 저 교산동 쪽으로 가고 그 자리에 공원이 생긴다는 바람에 우리 집터 200평만 남겨놓고 공사 돼서 지금 뺑 돌려 울타리를 해놨잖아

김연분  왜 거기에 공사가 됐느냐 하면 하남시에 스타필드라는 백화점이 들어왔잖아. 그게 50만 평이래. 그 백화점이 50만 평인데 1할은 공원을 지어야 그 백화점이 허가가 나온다네. 그러는 바람에 저 땅을 우리가 600평이나 되는 걸 뺏겼잖아. 그것도 자그마치 25만 원에. 

Q. 그게 언제인가요?

김연분  우리가 2016년도 7월에 이사를 왔으니까 그게 2015년도인가 2014년도에 빼앗긴 거야.

Q. 그때는 교산 신도시 발표도 없던 때인데도, 그런 일이 생기는군요.

지금도 방앗간이 굉장히 잘 되는 것 같아요.

김연분  아니야.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너무 달라졌어. 코로나 후로 누가 관광을 다니길 해, 무슨 회의를 하길 해, 무슨 대회가 있어? 떡이 나갈 일이 없어. 그런데도 우린 보상이 없잖아. 우린 그 손실보상이 없었어.

Q. 옛날 사진이 지금 어머님과 정말 닮았어요. 초등학교 때 웃으시는 얼굴이 지금과 똑같아요. 

Q. 이 사진은 언제인가요?

김연분  이건 열일곱 살 때 찍은 거예요. 열일곱 살 때.

Q. 이 사진 혹시 책에 넣어도 되나요? 

김연분  책에 들어가도 누군지 모르지. 누가 누군 줄 아나?

Q. 제가 책에 써놓으면 돼요. 책에 이 사진 들어가면 예쁠 것 같아요.

Q. 그래요. 그럼. 

김연분  이것도 대운동회 때. 고골 아가씨들, 여기 궁안에 아가씨들이 찍은 거야. 그때는 다 치마야. 그런데 이제 죽은 사람 많아. 관광할 때 데리고 간 거지. 이거는 뭐야. 스물두 살 땐가? 이거 봐. 이거 열일곱 살 때 사진이야.

Q. 이곳이 춘궁동인데, 춘궁동의 유례가 있나요?

김연분  왜 춘궁동이냐 하면, 이 마을 안에 옛날에 궁이 있었어. 이씨 조선시대에 궁이 있어서 어른들 말이 저쪽에 양반들이 있으면 여기서부터 상놈들이 기어가고 그랬대. 옛날에는 양반, 상놈이라고 그러잖아? 옛날에 그런 양반들이 있던 그 궁이 없어지고 조선이 망하고 그래서 여기 궁이 없어졌어. 궁이 없어져서 궁을 헐어서 지은 집이 세 집이 있어. 두 집은 지금 거의 남아 있고, 우리 친정집 옆집이 궁을 헐어서 지은 집인데 리모델링을 다 해서 그 집이 이제 옛날 집이 아니야. 그런데 그 밑에 집 하나는 옛날 집이 그대로 있어. 그때 그 집에 가면 꽃이 참 아름다워. 그 집 딸이 혼자 그 집에서 살아.

Q. 그분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겠어요.

김연분  그이가 칠십칠이야. 엊그저께 여기 왔었는데 일흔일곱 살이야.

Q. 동네 분들은 모두 다 친하시죠?

김연분  그렇지. 우린 다 한 동네지. 이 궁안 사람들은 다 한 집안같이 지내는데, 이제 이주하고 나면 뿔뿔이 헤어지는 거야. 이제 저 시내로 가서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도 있고, 멀리 못 가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는 저 배다리(지명) 뒷동네에 안촌이라고, 거기에 땅을 사놨으니까. 그 땅에 우리 집을 지을 거야. 아들이 지금 진행하고 있으니까. 터는 닦아놓았는데 허가가 들어가면 짓겠지. 

Q. 이곳에 보상은 완전히 끝났나요?

김연분  아들이 반만 받았다고 그랬는데… 너무 조금 나와서 아직은 반만 받았다고. 그러더니 다 받았다고 막내딸이 그러기도 하는데, 잘 모르겠어. 지장물은 아직 값이 하나도 안 나왔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어. 건물도 있으니까. 

며칠 전에 집에 와서 집 안에 있는 거 다 조사해가고 우리 집 뒤에 나무들도 다 조사해가고 그랬는데. 이제 그런 게 보상이 나오면 끝나는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지장물 보상은 아직 안 나왔어요.

Q. 보상이 완전히 끝나면 이사 가시겠어요.

김연분  그렇겠지. 그런데 보상이 끝나도 우리가 갈 곳이 있어야지. 집을 다 지어서 가야지.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또 금방 다 지어지는 것도 아니겠지.

Q. 위치는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안촌과 궁안마을을 비교했을 때요. 

김연분  위치는 여기가 더 좋지. 거기는 마을버스가 저만치 내려가야 타더라고. 이제 이사 가면 거기서 1번 마을버스 타고 하남시로 와야지. 시내에 아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많이 살면 버스 타고 와야지. 우리 오빠네도 하남시에 블루밍 아파트라는 걸 샀다고 하던데. 

Q. 친척분들도 다 여기 궁안마을 분들이시니까요.

김연분  여긴 거의 김씨가 많아. 이 동네가 김해 김씨 촌이야. 그래서 조카가 많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조카야. 나하고 동갑인 사람이 나한테 “할머니, 할머니” 그러는데, 조카들이 60살 넘은 사람도 많아. 우리가 촌수가 높아서 그래. 

Q. 교산지구에 여기 궁안마을 외에도 많은 마을과 동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연분  여기가 춘궁동. 저 위가 상사창동. 상사창동에서 내려오면 하사창동, 또 내려오면 항동. 또 이제 그 동을 따지고 동에서 또 상사창동 하면은 뭐 샘골도 있고 중촌말도 있고 그 이렇게 또 동네마다, 사람이 살면 이름이 제각각 있듯이 궁안, 상사창동 하고도 법화골, 항동, 왜골, 내미길, 골말, 열두골이야. 골 이름이 이렇게 많아. 골말, 샘골, 항골. 그렇게 다 동네마다 이름이 있어요.

Q. 옛날에는 동네마다 좀 멀게 느껴졌나요?

김연분  옛날에 차 안 다닐 때는 마을버스가 다녔으니까… 그렇지. 멀었어. 옛날에 마을버스가 생기기 전에 동네마다 다니는데 운동화가 금방 해진대. 차비 내면 그 운동화 사고도 남는다잖아. 차비가 더 싼 거야. 

Q. 그렇네요.

김연분  그랬다고 노인네들이 이야기했어. 여기 우리 동네 앞으로 경기 시외버스가 크게 다녔어. 우리 방앗간으로 사람들이 찾아올 때 서울에서 왕십리, 뚝섬 그런 데서 가래떡 하러 명절 때 차로 하나씩 오는 거야. 쌀들을 들고서. 한 말 하는데 서울은 천 원이래. 근데 그때 시외버스가 이십 원, 삼십 원 했었어. 그러니까 떡을 두 말 하면 이천 원 아니야. 그런데 서울에서 차비가 이십 원, 삼십 원 하면 육십 원만 있으면 왔다 갔다 하니까 두 말만 해도 비누가 두 짝씩 떨어진다는 거야. 서울 사람들이 오길래 “왜 여기까지 하러 오느냐?” 내가 물으면 한 말만 해도 무궁화 비누가 한 짝씩이라고 했어. 

김연분  여기 옛날 우리 방앗간에 가면 비석을 해서 세워뒀어.

Q. 혹시 그 집도 교산지구에 포함되나요?

김연분  거기도 다 없어지지. 그래서 내가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을 떼다가 이 집 지은 데다 갖다 놓아야 하나 그랬는데… 내가 예전에 거기 비석 있는 데서 방앗간을 할 때 우리가 발동기를 사다 놓았어. 발동기는 이 피대(두 개의 바퀴에 걸어 동력을 전하는 띠 모양의 물건)로 돌리거든. 아마 지금은 모를 거야.

그땐 발동기를 돌려서 기계에다가 넙적한 피대를 넣어서 돌아가게 한다고. 그거를 이만 원만 주면 사는데 돈이 이만 원이 없어서… 그때는 이자가 7부야. 이자가 그렇게 비싸. 만 원을 빌리면 7천 원씩 한 달에 줘야 했어. 2만 원 얻으러 여기서부터 저 꼭대기 집까지 가도 이만 원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어. 우리가 망할까 봐 그랬는지. 그런데 우리 친정엄마가 옛날에 다달이 돈을 걷어서 예금했다가 명절 때가 되면 그 돈을 다시 걷어 농협에 가서 찾았어. 근데 그땐 오빠가 그걸 집안 아저씨하고 했는데, 내가 오빠한테 돈을 꿔달라고 했어. 내가 아침 열 시까지 2만 원만 갖다 달라고 그랬더니 오빠가 안 가져와. 그래서 뛰어 올라갔더니 오빠가 그 친척 아저씨가 주지 말라고 했대. 만 원 돈을. 그래서 내가 집에 쌀이 세 가마가 있는데, 쌀 한 가마가 칠천 원 했을 때, 그때 세 가마만 팔면 이만천 원이야. 그러니까 “오빠, 내 그 쌀을 쌀가게에다 팔아서 줄게.” 그랬어. 그랬더니 이만 원을 줘서 우리 집 아저씨가 저 청계천 가서 그 피대를 사서 왔어. 그렇게 사서 와서 신장 쌀가게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아저씨가 쌀을 실어 가라니까, 차가 와서 실어 가고 돈 이만천 원을 받고. 이만 원 받아서 오빠 가져다주고. 그렇게 해서 방앗간을 했어. 집은 다섯 칸짜리 집이었는데, 세 칸은 한 칸 반씩 나눠서 썼고. 그렇게 해서 다섯 칸짜리 집으로 세간을 난 거야. 내가 결혼해서 송아지를 조그만 거, 그때는 그게 몇만 원 했겠지? 그 송아지를 사다가 일 년인가 이 년을 기르니까 큰 소가 돼서 십삼만 원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집은 한 채에 오만 원을 받고, 소는 십삼만 원을 받아서 버텨서 발동기를 산 거라고. 

김연분  하여튼 우린 방앗간 차릴 때 말도 못하게 힘들었어. 밤나무를 패다가 서까래에 걸치고 슬레이트 위에 돌을 올려놓고 거기다가 부로꼬(벽돌) 그거를 위에다 지붕에다 전부 다 올려놨어. 아유, 그랬는데 이틀 있다가 비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서 와보니까 슬레이트가 다 날아가고, 그 부로꼬가 슬레이트 위로 날아다니면서 기계를 깨트리고 그랬지. 밑에 기계 갖다 놓은 데로 슬레이트가 다 부서진 거야, 비바람에.

Q. 정말 고생하셨겠어요.

김연분  그래서 그거 다 치워서 또 사다가 다시 세우고 그렇게 했을 때였어. 그때 가래떡 한 말 하는 게 지금은 삼만 원이야. 그때는 백 원이었어. 그러니까 서울에서 천 원에 한 사람들이 일부러 여기까지 떡을 하러 온 거야. 그때 백 원 할 때 우리가 이 땅을 산 거야. 이 땅을 한 평에 구백 원씩에 산 거야.

Q. 가래떡 아홉 말과 바꿀 수 있는 땅이었네요. 

김연분  그렇지. 가래떡 아홉 말만 하면 한 평을 샀는데. 지금은 열 가마를 해도 땅을 못 사. 땅이 천만 원씩 그러잖아. 고골은 땅값이 유난히 비싸. 그렇게 세월이 흐른 거야.

김연분  아주 고생이 많았어. 친정에서는 아빠가 내가 아홉 살에 돌아가시니까 엄마가 나 아홉 살, 오빠 열두 살, 동생이 나하고 여섯 살 차이야, 그러니까 세 살 먹은 자식, 이렇게 셋을 두고 신랑이 죽었으니 우리 엄마가 서른셋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어. 그러니까 내가 학교를 어떻게 계속 다녔겠어. 우리 동생은 고등학교까지 나왔지. 그래서 엄마가 맨날 장사를 다녔나 봐. 옛날에는 김장해서 한겨울 먹다가 명절 정월만 되면 김치를 팔아. 그러면 엄마가 고골에 다니면서 김치를 사다가 서울에 가서 파는 거야. 

김연분  나는 학교도 간신히 다니고… 일도 많이 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 많이 해왔어. 

김연분  모 심으려고 풀밭으로 들어가면 거머리가 다리에 붙으면 그게 무서워서 막 길로 뛰어나가서 돌멩이로 그걸 막 때려서 떼어버리고 또 일하러 내려가는 거야. 그때는 이런 양말 하나가 없었어. 기다란 양말이. 그거라도 신으면 덜 그랬을 텐데. 거머리가 붙으면 막 피 빨아 먹잖아. 

김연분  그런 일도 많았고. 그리고 여기가 밭이었거든. 우리 친정에서 밭에서 일해야 하니까 송아지를 엄마가 하나 사 왔어. 남편도 없는 사람이 돈을 어떻게 장사를 해서 마련했는지, 그걸 사왔어. 송아지가 작은 게 꼭 큰 개만 하대? 집안 아저씨가 저 광주장에 가서 사다 줬어. 그때 동네 사람들이 죄다 구경 오는 거야. 그러다가 그 큰 개만 한 송아지는 꼴을 베어 먹여야지. 내가 지게를 빌려다가 꼴을 베러 가는데 아니, 학교 선생님을 만난 거야. 얼마나 창피한지도 몰라. 그렇게 별짓 다 하고 나 고생 엄청 많이 했어. 나같이 고생한 사람 없을 거야, 아마도.

김연분  그때는 고생을 많이들 했지. 그렇지만 나같이 그렇게 고생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 같아. 딴 데서, 외부에서 시집오고 그런 사람들 내막은 내가 잘 모르지. 

요새 마을 회관에 가면 공부를 가르쳐 줘. 조금 더 배운 사람이랑 아주 모르는 사람이랑 다 가르치는데 제대로 모르는 사람 중에는 자기 이름도 간신히 쓰는 사람도 있더라고. 거기 오는 사람 중에 나 아는 사람인데 1학년인가밖에 학교에 다니고 못 다녔대. 2학년에 올라가려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가 술장사했대. 그런데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가려오라는데 육성회비 낼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술 한 가마를 가져오면 돈을 안 받고 가르치겠다고 그랬대. 그런데 그 아버지가 술 한 가마니를 안 줘서 학교에를 못 다녔대. 그래서 자기 아버지 돌아가시고도 울지도 않았대. 

김연분  이제 어디 가도 자기 이름만큼은 쓸 줄 알아야 하잖아. 언젠가 여기 학교(방앗간 앞 고골초등학교) 선생님이 떡을 맞추러 와서 내가 글씨 쓰는 거 보고 “어머나, 어쩌면 글씨를 그렇게 잘 쓰세요.” 그래. 그래서 “맨날 써봐서 그렇지.” 했어. 어떨 땐 빨리 쓰고 어떨 땐 잘 쓰려고 하면 예쁘게 써지고 그러는데. 학교 다닐 때 붓글씨도 내가 쓰면 그게 꼭 학교 벽에다 붙여졌어. 내가 쓰면 꼭 그런 건 붙었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곧잘 하고 그랬는데… 내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Q. 이제 여기서 편하게 사시려고 이렇게 멋진 건물도 지으셨는데요.

김연분  그랬는데 이렇게 쫓겨나게 생겼으니까…

Q. 이제 이사 가시게 되시면 이 동네에서 꼭 가져가고 싶은 게 있으실까요?

김연분  가져가고 싶은 거는 아무것도 없어. 꽃나무밖에 더 있어?

김연분  우리 집에 가면 내가 커다란 도자기 여러 군데에 꽃나무들을 가득 심어놨지. 

Q. 화분은 가져갈 수 있으셔서 다행이에요.

김연분  그런 건 다 가져가야지.

Q. 혹시 방앗간에 이 기계들도 다 가져가시나요?

김연분  못 가져가지. 이런 건 지장물 보상을 받아야지. 얼마 전에 지장물 조사원이 와서 이런 것들 다 적어갔어

Q. 여기 이 동네에 관해서 어머님의 기억이나 아니면 꼭 이거는 기록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김연분  남겨지면 좋겠다 싶은 건… 이 궁안이라는 동네지. 여기서 농사도 짓고 내가 이런 사업도 했는데, 이제 못하는 게 아쉽지. 

김연분  농사짓는 거, 그것도 아쉽고. 나는 지금 땅을 안촌에 150평을 사놨으니까, 이제 집 짓고 땅이 남으면 꽃나무를 많이 심어야지. 나는 꽃나무를 무척 좋아해. 나무 자체를 좋아해. 무슨 나무가 있으면 아주 자세히 보고 그랬는데. 이제 그런 게 없어지니 아쉬운 거지. 이 동네에서 정말 친척같이, 집안사람들 같이 살던 사람들이 헤어지는 게 제일 아쉽지. 여기 고향을 완전히 떠나는 거지. 그게 제일 아쉽지. 이 동네 사람들하고 이제 헤어지는 게 제일 아쉬운 거지. 친정 동네에서 살아서 친정도 이렇게 자주 보면서 살다가 뿔뿔이 헤어지는 거야. 그게 다 아쉬워. 

Q. 근처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실까요?

김연분  근처로 가는 사람이 없어. 아파트 사서 간 사람들 있고, 저 멀리 퇴촌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엊그제 한전에서 나온 돈으로 이 동네 마을 전체가 놀러 간 거야. 

Q. 몇 분이나 가셨어요?

김연분  서른여덟 명. 

Q.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그런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김연분  헤어지기 전이기도 하지만 동네가 없어진다는 게 제일 아쉽지. 이 궁안이라는 동네, 고골이라는 동네가 없어지는 게 아쉬운 거지. 한집안 식구 같이 살고 이웃을 정말 식구처럼 지내다가 뿔뿔이 헤어진다는 게… 진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야. 

Q. 그래도 이사 가시면 더 멋진 집을 짓게 되실 거예요.

Q. 이제 그럼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앞으로 어머니의 꿈은 무엇인가요?

김연분  앞으로의 꿈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 거. 그게 제일 꿈이지. 고생 안 하고 죽는 거. 자다가 죽는 거. 

김연분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이 직업을 버리고 다리는 좀 아프지만 많이 돌아다니고 구경 다니고 싶어. 구경이나 실컷 하다가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고 그러다 죽으면, 고생 안 하고 빨리 죽는 그거가 제일 내 소원이야.

Q. 여행 다니시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실 날이 앞으로도 20년은 남았어요.

김연분  그동안에도 많이 다녔지. 외국에도 많이 가고, 중국에도 네 번을 갔다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