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대 # 송파구 40년 거주 # 건물주
안병은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나는 송파구 삼전동에 사는 안병은입니다.
지금 사는 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내가 시집을 간 데가 중구, 지금으로 따지면 청구역이에요. 우리 집 양반이 해병대를 나왔는데 직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삯바느질을 20년을 했어요. 지금 눈도 잘 안 보이고 그래요. 거기서 1남 3녀를 낳았죠. 그러고 살다가 이 양반이 도박을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집이 다 넘어가고 살 데가 없어서, 돈을 조금 챙겨서 집을 얻으러 송파구로 왔어요. 내가 돈 700만원을 가지고 집을 얻으러 오니까 그걸 달라고 집 양반이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깎지도 못하고 돈 가진 걸 계약금으로 줘서 이 집을 산 게 1985년도예요. 그러고 2012년도에 집을 새로 지었어요. 그러니까 이 집에 산 지 35년 정도 됐네요. 집 짓느라고 빚져서 전세 놓고 월세 놓다가 안 쓰고, 안 먹고 모아서 하나씩 월세를 돌려서 그걸로 생활하고. 애들은 다 나가 살고. 제일 맏딸은 미국에 나가 살고 있어요.
어떠한 이유로 주거를 이동하게 되었나요?
용인에 경기도 백암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태어났지요. 어머니는 친정이 안성이에요.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고, 아버지는 가난한 집 아들이고. 어른들이 선을 보고 그냥 결혼을 해서 그러고 죽산에 살았어요. 난 친정에서 7남매에 맏딸이에요. 그 시절에는 엄청 배고팠어요. 먹을 게 없는 보릿고개 때예요. 나는 37년생이니깐 전부 배곯고…. 초등학교 1학년 땐 8.15, 6학년 땐 6.25가 일어났어. 그랬는데 이제 이 좋은 세상에서 죽을 나이가 되니까 너무 슬퍼요. 송파구에는 우리 집 양반이 돈 놀음을 하느라 돈을 달라고 날 쫒아오고, 난 안 뺏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당시에 외삼촌이 송파구에 사셨어요. 그래서 근처인 여기로 방을 보러 왔는데 옛날에는 반지하 밑으로 세가 쭉 있더라고요. 내가 방을 얻으러 왔다고 하니까 세를 그냥 다 띄고 사시라 그래. 외삼촌이 여기 계시고 하니까… 세 얻으러 왔다가 전세를 다 끼고 이 집을 1985년도에 샀다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이전에는 반지하 있는 2층짜리 집이었어요. 그때는 이 주변에 집이 없고 몇 집만 있더라고, 시골같이. 우리 올 땐 주변에 벽돌 찍고 기왓장 만들고 이 앞이 전부 그랬어요. 앞에 노인복지관, 성당 그게 전부 다 빈 곳이었는데 우리 오니까 다 지어진 거지요. 지하철 9호선 생기니까 이젠 집이 다 꽉 찼네요. 지금은 집값이 많이 오르니까 조그만 땅만 있어도 다 짓지요. 그래서 이젠 빈터가 없네요. 전철이 생기니까 집값이 많이 올랐지요. 살기 좋은 도시 1위래. 여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장소에서 가장 좋았던 추억이 있나요?
여기 송파구에 올림픽공원도 엄청 좋아요. 예전엔 거기도 친구들하고 잘 갔는데… 노인 복지관에서 단체로 갔어요. 거기서 운동회, 강의, 체육대회 같은 것 할 때 가고 그랬지요. 79세까지는 잘 다녔어요. 올림픽공원 안에 체육관, 종합운동장이 있어요. 주경기장 그 안에서 서울시에서 해마다 하는 게 있어요. 서울시 체육대회라고. 탁구나 배드민턴 선수들이 10명씩 나가면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응원하러 나갔어요. 가면 티셔츠도 주고 점심 도시락도 주고 그래요. 이렇게 시내에 올림픽공원, 석촌호수 같은 게 있는 곳이 어디 있어요. 시골엔 있어도 서울 한복판에 이런 게 있는 곳은 드물잖아요. 우리 집에서 저 124층 건물도 환하게 다 보여요. 옛날엔 석촌호수까지 만날 걸어서 갔어요. 한 바퀴 돌고 오면 1시간 반이 걸려요. 근데 18년도 수술 이후에 다리가 낫질 않아서 거길 몇 년째 못 간다니까요. 지난 번에 뉴스 보니까 벚꽃이 엄청 좋던데 거길 못 가봤어요.
과거 피난으로 이주를 했을 때 기억이 있나요?
아버지가 용인에 사시다가 하도 가난하니까 황해도로 가신 거예요. 황해도는 이북인데 삼팔선 안 생겼을 때. 45년도 해방 전해에. 거기 살다가 8.15 해방이 되고 삼팔선이 생기니까, 소달구지를 타고 엄마랑 아버지는 걷고, 나랑 동생들은 소달구지에 타고 삼팔선을 넘었어요. 8.15때. 그때 아버지가 황해도에서 건축업을 하셔서 집을 지었는데, 삼팔선이 생기니까 돈을 하나도 못 받고 넘어왔다니까요. 그러고 삼팔선 넘어와서는 중앙대학교 있는 상도에서 살았어요. 쌀이 없어서 죽을 쒀 먹고. 그땐 배급을 줬어요. 집이 가난하니까 어머니가 다른 집에 가서 밥 해주고 한 사발 얻어오면 같이 물 말아서 먹고서 겨우 자리 잡으려 하는데 6.25 전쟁이 난 거야. 그때 죽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중공군이 쳐들어와서 낙동강까지 왔잖아요. 또 충청도 음성까지 피난을 갔어요. 그때 먹을 게 없어서 벼를 얻어가지고 찌어서 죽을 쒀서 소금하고 먹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좋은 날이 왔는데 나이를 먹어서 죽을 날이 됐으니 슬프다니까요. 내가 맏딸에 일곱 번째 막내가 딸이고 가운데가 육 형제인데 6.25 때 돌도 안 된 애기가 홍역이었어요. 땀띠 같은 빨간 꽃이 나질 않아서 애가 헐떡하고 죽으려고 하고. 불을 켜면 폭격을 하니까 엄마랑 나랑 애기를 안고 막걸리 찌깽이 있어. 껄뜰한 거. 꽃 나라고 먹이니까 그게 넘어가질 않고… 그래가지고 죽었어, 하나는…. 그래서 오형제가 있어. 지금.
현재 집에 대한 고민이 있나요?
지금 생각하면 집 지을 때 욕조를 안 했어. 지금 다리가 아프니까 뜨거운 물에 다리를 담그려는데 욕조가 없으니까 통을 샀어. 그게 후회스러워요. 주차장에 기둥을 3개를 했는데, 4개를 했으면 좋았을 걸 말했더니 건축업자들이 어찌 야단을 하고 팔팔 뛰던지… 집 짓는 사람들한테 맡기면 그걸로 끝이지. 할아버지는 새집 짓고 1년 살고 돌아가셨어. 터가 넓지도 않아서 엘리베이터도 못 놓고… 그리고 일조권 때문에 5층은 반이 그냥 지붕이야. 저만큼 방을 내고 싶었는데… 이제 나이도 많고 몸 성치 않은데 임대 놓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사람이 막 피가 말려. 사람이 천태만상이잖아요. 그럼 뭐 어떡해. 그러려니 하면서 사는 거지. 요새는 이제 2년 기한인데 이즈막에 다 이사를 와서 다 도배하고 수리해서 남을 줘야 되니까 그럴 때 좀 힘들지. 근데 뭐 일일이 따지면 그렇지 뭐. 사는 게 편한 게 어디 있어요.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집이 내 이름으로 돼 있어. 지금 나한테 생활비를 주는 사람은 없어요. 이 집이 없었으면 폐지 주우러 다녀야 된다 하지요. 집에서 돈이 안 나오면 뭐… 자식들이 주긴 하겠지만 여기서 내 생활비가 나오니까 내가 농담으로 ‘야, 집이 자식보다 낫다.’ 하지요. 근데 세금이 또 10가지는 돼. 어휴. 종합부동산세, 무슨 세, 무슨 세… 해서 세금 내기도 바쁘다니까요. 그래도 내가 애들이 벌어서 지네 사려고 애쓰는데 그거 달라는 것보다 마음은 편해요. 여기서 세금 내고서 남는 돈을 내 맘대로 쓰면 되니까… 근데 이게 젊어서 고생을 해서 돈을 지금 젊은이들처럼 잘 쓰질 못해요. 청년들은 돈이 없고 노인들이 돈이 있대. 쓰질 않으니까. 너무 고생한 게 몸에 배어서 아까워서 못써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한 번도 안 입은 신사복이고 뭐고 다 갖다 버리는 거 보니까, 난 그 이후로 옷을 안 사요. 죽으면 다 갖다 버리니까 옷을 안 사게 돼. 있으면 있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입고… 다 갖다 버리니깐 아깝더라고요.
3년 후에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나요?
여행 가고 싶지. 외국은 힘들고 다리가 나으면 한국에라도 좋은 데 여기저기 다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