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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 롯데월드 시계탑 # 송파구 거주 및 캐나다 이주

윤의정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저는 윤의정이고요. 가정주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한 십 년 넘게 제 일을 했는데 그걸 관두고 아이들 육아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고, 수필을 좀 쓰고 있어요. 그래서 인터넷에 연재하고 있어요. 여기가 캐나다인데요, 여기 문학협회에 소속돼서 글을 쓰고 있어요. 거의 놀고 있죠.

지금 캐나다 어디에 거주하고 있나요?
캐나다 밴쿠버인데요. 정확히는 밴쿠버 바로 밑에 리치몬드라고 해안가 도시인데,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에요. 밴쿠버 국제공항이 있는 도시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도시가 작거든요. 끝에서 끝까지 20분이면 가는 작은 해안가 도시에서 살고 있어요.

리치몬드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요?
제가 생각이 되게 많았거든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실은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아이들을 어떻게 한국 교육에 맞춰서 공부를 시킬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저희 큰 아들 성격도 좀 독특해요. 엄마라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조용하고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제가 사교성 좋게 정보를 잘 찾아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 가능할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우연치 않게 캐나다 교육을 접했고 여기가 상대적으로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고 어릴 때 시골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구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어렸을 때 저처럼 아이들이 뛰어 놀고 개구리도 잡고 풀밭에서 뛰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선택을 하게 됐고, 지금까지는 만족하고 있어요. 학원을 다닌다거나 학교 끝나고 와서 바로 공부를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적어도 많이 뛰어놀아 건강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초등학교 말고는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캐나다로 언제 이주하시게 되었나요?
이제 만 3년 지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어디에 사셨나요?
제가 송파구 방이동에 살았어요. 방이역이 있는 곳에서 저희 신혼 생활도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서 첫째 둘째까지 낳았고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에 이곳에 왔으니까 되게 오래 살았지요. 그전에도 방이동과 인연이 깊어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부터 방이동에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한 30년이 넘은 것 같아요. 굉장히 오랜 기간 살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거주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을까요?
실은 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서울시 관악구에요. 너무 어릴 때라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곳에 외가가 있었거든요. 외가댁에 화장실이 푸세식이었어요. 그 기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기억이 있어요. 아주 어릴 때는요. 그다음에는 제가 방배동으로 이사 갔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88년도, 88 올림픽이 난리가 났던 시절이에요. 그 당시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저희 어머니께서 추진해서 방이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방이동이 어떤 곳이었느냐면 올림픽체조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있는 곳인데, 저희 어머니는 집 옆에 올림픽공원이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지금은 한국이 정말 대단해졌고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당시 한국이 올림픽을 연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얘기였거든요. 88년도에 올림픽을 중심으로 한국사가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셔서 방이동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방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가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를 그곳에서 보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교 들어가면서 저 스스로 돈을 벌고 독립을 하게 됐어요. 취업도 하고 그러면서 친구와 자취를 했어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예전에 단국대학교가 있던 한남동인가, 그곳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어요. 그리고 회사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강남에 있어서 출퇴근이 어렵지 않았죠. 거기서 지내다가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죠. 결혼하고 나서 미국을 갔어요. 남편과 초등학교 동창이거든요. 6학년때 짝이었어요. 한마디로 같은 동네에 같은 학교에 다닌 거죠. 남편이 유학생이어서 미국에 잠깐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방이동으로 가게 된 거죠. 거기서 애도 낳고 애를 키우다 보니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에서 저희 어머니처럼 딱 결단을 내리고 이사를 와서 캐나다에 있게 된 거죠.

과거의 지역에서 당시의 상황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방이동과 송파구의 많은 기억이 있는데요. 얼마 전에 여기서 알게 된 조카라고 부른 아이가 있는데요. 그 아이가 하루는 제게 물었어요. “이모는 참 좋았겠어요. 이모는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다 경험하고 살아보셨잖아요. 밀레니엄시대를 넘어가면서 어떠셨어요? 예전에 아날로그 시대에는 어떠셨나요.”라며 굉장히 많은 질문을 했어요. 그동안 저 스스로가 많이 늙었고 한 게 없다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그 친구 이야기에 그래 내가 디지털 과 아날로그 시대를 모두 경험했고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가 정말 보람이 있는 거예요. 한 게 없지만. 예전에 우리가 어떻게 약속을 했고 친구를 만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잠실 롯데 월드에 시계탑이라는 공간이 있어요. 큰 시계가 앞에 붙어있고 정문이에요. 롯데월드의 아이들과 약속을 하면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으니까, 삐삐도 없으니까 “우리 어디에서 몇 시에 만날까?” “우리 토요일 3시에 시계탑 앞에서 만나.” 하면 곧 죽어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가야 했거든요. 약속을 중간에 바꿀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 공간이 약속의 공간이라는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기능이죠. 지금은 어디서 만날까를 순간순간 메시지로 바로 정하잖아요. 그때는 그 공간이 주는 이미지가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이곳에 가면 친구를 만나는 공간, 이곳은 우리의 약속의 공간, 시간을 정하고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느낌? 저는 그 공간에 굉장히 많은 기억들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기 전까지 모든 추억이 아무래도 그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지금도 그 공간을 생각할 때 굉장히 연결성 있게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많아요.

송파구에서 거주하시면서 어린 시절과 현재까지의 기억에서 달라진 것들을 느끼셨나요?
많이 느껴져요. 예전에는 정보가 늦었잖아요. 직접 뭔가를 전달받아서 변화하거나 영향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단 말이에요. 어떤 정보를 얻으려면 굉장히 복잡한 루트를 경험했겠죠? 유행이 한번 번지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지역적인 특수성이 존재했는데 요즘은 한국에서 유행하면 여기서도 유행해요. 그게 좀 사라진 느낌이에요. 지역적 특성이라고 할까. 예를 들어 코로나 생기면서 달고나 커피가 유행했잖아요. 여기 캐나다인데도 여기서 달고나 커피를 먹고 포스팅하고 공유하고 여기 사람들도 “달고나”라고 하거든요. 제가 느끼기에는 지역성이 많이 엷어진 느낌. 예전에는 머리 모양만 봐도 깻잎머리냐 앞머리를 올렸느냐, 내렸나 이런 걸로 나눴는데 요즘 저 사람이나 나나 다 똑같잖아요. 요즘은 그런 부분이 좀 사라진 느낌이에요.

서울에서 캐나다로 이주하셨는데 공간의 이동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제가 성격이 변했어요. 공간이 가진 특성이 줄어들긴 하지만 특성을 만드는 건 사람이잖아요. 사람의 어떤 특성이 지역마다 다른 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편하고 저를 다 많이 알고 저도 많이 아니까 제 말 하나 제 행동 하나하나가 좀 더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안 되면 말로 풀고 제가 가만히 있어도 어쨌든 오랜 기간 있었으니까 제 주변에 저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가만히 있어도 점진적으로 저를 아는 사람들이 생기고 거기 안에서 편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익숙해지는 게 있었어요. 친구를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동창이 생기고 회사를 다니면 동료가 생기고 제가 쉽게 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동이라는 게 참 저는 약간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제가 딱 오면서 ‘아, 정말 나는 던져진 존재구나.’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저를 몰라요. 아무도 저와 관련된 사람이 없고 내가 노력하지 않는 인간관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저의 성격을 바꾸려고 되게 노력을 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내가 어떤 성격이든 나를 받아주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지만 여기서는 저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를 좀 받아줘.’라고 어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나는 던져진 사람이니까…. 그래서 말이 좀 많아졌어요. 말도 많아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성격이 되어야겠다, 하는 노력도 하고 인싸아닌 인싸가 되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아요.

분절된 케이스인 것 같아요. 거의 모든 관계가 방이동 안에서만 이루어지다가 갑자기 멀리 가신 경우는 흔치 않잖아요. 보통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계속 돌아다니니까요.
제가 그래서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조금이라도 경험했으면 어떤 예측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 그런 예측을 할 수 없는 겁이 없었던 거죠. 경험을 안 해서 겁이 없어서. 알면 못했을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이렇게까지 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것도 있고요. 주어진 것의 고마움을 배워야겠다, 생각도 되게 많이 했고 후회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그냥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가장 큰 교훈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한 면만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여기서 인싸가 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다보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모든 에너지를 집에서 충전하는 것 같아요. 집은 제게 에너지의 근원? 집에서 따듯하고 집에서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해야 그 모든 게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나가서 사회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공간이 집이잖아요. 생활의 거의 대부분의 영역이 집이기 때문에 집만큼은 양보가 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요. 저한테 여기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이에요.

가장 살고 싶은 집이나 지역이 있을까요?
제가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데나 와서 살아 보니 지역에 대한 얽매임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에요. 그런데 공기는 좀 맑아야겠다. 한국에 미세먼지가 많잖아요. 제가 오기 전에 미세먼지가 되게 심했고 저희 큰 아들 같은 경우에는 공기가 안 좋으면 코피를 바로 흘리거든요. 캐나다에 와보니 여기는 공기가 참 좋아요. 그리고 날씨가 좀 좋은 거. 따듯한 지역. 이런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여기 살다 보니까 여기가 겨울에 영하가 안돼요. 겨울에도 0도면 큰 일 나는 줄 알아요. 따듯해요. 그리고 여름에는 안 더워요. 여름에도 20도가 안 되는 날도 되게 많아요. 날씨가 사람이 지내기 좋은 도시다 보니까 저 스스로 환경적인 걸 탓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까 어떤 자연환경과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기가 좀 맑고 햇빛이 좀 잘 들고 그런 자연환경적인 게 좀 더 중요한 조건인 것 같아요.
그리고 집은, 집도 어떤 느낌이냐면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중요한 곳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한 로망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아파트보다는 집을 선호하는 느낌이거든요. 땅을 밟고 산다는 안락함, 편안함이 있어요. 물론 할 일 정말 많아요. 거미랑 친해지고요. 모기는 이웃사촌. 이런 느낌이고 라쿤도 되게 많아요. 저희 강아지도 라쿤한테 공격을 당해서 병원에 실려 가고. 까마귀도 만날 와서 저를 위협하고. 정말 일은 많은데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땅과 흙이 주는 안락함이 있어요. 어디서 살든 땅을 밟고 사는 거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한테는. 그게 달라진 점인 것 같은데. 날씨가 좋고 환경이 좋고 땅을 밟을 수 있는 곳. 그런 포근한 나만의 공간?

집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이 있나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제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집에 대한 것은 모든 게 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능력이 출중하거나 진짜 메가걸이 되어서 로또가 된다면 가능한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 일하는 게 변변치가 않고 능력이 출중하지 않고 한 방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이라서 계획을 갖는다, 라는 건 쉽지 않아요. 아까도 말한 적 있지만 저는 미래 사회에서 어디서 사는 게 중요한가? 하는 고민도 있어요. 떠나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 어딘가 정착하고 살면서 이 집을 갖고…이런 욕심이 없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인 것 같아요. 지금 저는.

3년 후에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이루고 싶은 꿈은 어떤 게 있나요?
그럼 정확한 계획을… 창피한데… 원래 제 꿈 중의 하나는 막장 아침드라마를 쓰는 거였는데요. 아침드라마를 너무 쓰고 싶어요. 제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피아노를 쳐봐도 뭔가 사랑이 주제인 것은 기계적인 것밖에 안 되고, 그래서 막장 아침드라마를 사랑에 관한 얘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이야기로 쓰고 싶은데…. 아침드라마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글 쓰는 일을, 시라도. 원하는 작품을 쓰고 원하는 글쟁이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