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 기획자 # 위례 거주 # 송파구 장기거주민
송수희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송수희입니다. 현재 본 프로젝트의 기획자입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전시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
위례 신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위례 신도시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어릴 때 송파구가 생기기 전, 강동구였을 때부터 살기 시작했는데요. 방이동에서 계속 살다가 10년 전에 독립해서 혼자 살기 시작했어요. 관악구, 마포구에서도 살고 여러 지역을 전전했는데 원래 살던 지역이 편해서 다시 송파구로 왔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성내천에서 혼자 산책을 했는데요. 다른 지역에 살다보니까 성내천이 없어서, 오랫동안 걸어 온 익숙한 길이 없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동네에 살다가도 곧 다시 송파로 돌아오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송파에 위례 신도시가 생기면서 아파트 청약을 넣고 싶어서 지금은 위례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주거를 이동하게 됐나요?
1988년도에 올림픽을 개최하면서부터 송파구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릴 때는 명일동 현대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아버지께서 건축을 하셔서 송파구에 건물이나 빌라를 계속 지으셨거든요. 그래서 건물이 팔리면 또 다음 건물로 이사 가고. 그런 식으로 송파에서만 1,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어요. 현재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방이동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착하게 됐죠. 독립하면서는 서울의 다른 곳에서 살기도 했지만 곧 본가 근처로 돌아와서 살게 됐어요. 잠실에서도 혼자 오래 살았고요. 얼마 전까지 부모님께서 하시던 사업장이 하남에 있었는데 그곳에 단독주택이 있어서 하남에서 살기도 했어요. 위성처럼 본가 근처에서 독립해서 살아왔죠.
오랫동안 살아온 송파구에서 변화를 느끼는 점이 있나요?
아주 어릴 때, 송파구는 신도시 같았어요. 올림픽공원이나 올림픽아파트도 없었고, 근방의 아파트도 거의 없고. 그때 많은 것들이 지어지고 한 번 세팅된 이후에는 지금까지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게 유지돼 온 것 같아요. 외적인 변화는 없는 반면 장소의 성격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송파구가 베드타운이었거든요. 조용하고, 안정적이고, 서울 시내가 멀어서 대학교도 멀었는데. 언젠가부터 송파가 집값 비싼 곳, 서울 부동산의 핵심지가 돼버린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장소에서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나요?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방이동 집에서 저는 1층에 살았고, 5층에 제 친구가 살았어요. 그 친구랑 중·고등학교와 20대 전부를 함께 보냈어요. 그 친구가 제게는 가족보다 가까운? 어떤 의미로는 ‘저’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친구의 성격이 사회적이지는 않고 혼자서도 뭐든 잘 하는 그런 친구였는데, 둘이 있으면 항상 말없이 각자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 있었어요. 보통의 친구들과는 좀 다른 사이였어요. 그 친구 덕분에 힘들게 겪으면서 성장하는 어린 시절을 잘 지내왔어요. 즐거웠던 일은 너무 일상적이죠. 근데 그 친구가 20대 후반에 죽었어요. 그런데 이게 말로 잘 설명이 안 돼요. “사람이 죽었다”거나 “친구가 죽었다” 이런 느낌이 아니에요. 그 친구가 아니라 내가 죽었어도 큰 차이가 없다는 그런 느낌이에요. 실제로 친구가 죽었을 때 슬프다기보다 당황했는데, 죽은 게 왜 내가 아니라 얘지? 이런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어요. 함께 친했던 다른 친구가 한 명 더 있어요. 근데 그 친구가 이 친구가 죽어서 미안하다고 할 때 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안한 것도 남한테 드는 감정이잖아요. 그 친구는 저의 어떤 한 부분이에요. 서로 집안 환경도 분위기도 비슷하고 성격은 다르지만 성향이 비슷해서 항상 자매처럼 지낼 수 있었어요. 저한테는 그 친구가 즐거웠던 일이나 에피소드를 넘어서는 하나의 완전한 유년시절 같아요.
오랜 기간 거주했던 송파구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방이동 방이역 쪽에 가면 아파트 단지가 크게 있고 상가 단지가 있어요. 그쪽에 아버지가 건물과 빌라를 많이 지으셨어요. 그때가 80년대 중후반이었는데 아버지가 건축하면 바로 그곳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그때만 해도 주변이 다 구릉이 있고, 배밭이 있고, 시냇물도 흐르고, 간간이 지어진 신축 건물이나 상가 외에는 다 판자촌이었어요. 저는 강동 쪽에 살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쪽으로 이사를 오면서 늘 그렇듯 새집에 이사 가서 살고 있는데, 이사를 간 지 얼마 안 돼서 키가 작은 여자아이가 제게 오더니 여기 우리 집이니까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모르는 동네에 처음 왔는데 전 너무 겁을 먹었죠. 머리가 뽀글뽀글하고 굉장히 앙칼진 아이였어요. 그 친구의 무리가 몰려와서 여기 원래 우리 집이었는데 너희 아빠가 집을 지었다고 저보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너무 무서워서 숨어다녔던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집 뒤쪽에 판자촌이 많았는데 그쪽에 무허가로 살던 사람들이 저희 아버지가 땅을 사니까 그 뒤로 이사 가게 된 정황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동네 애들끼리 놀다 보니 저도 나중엔 친해졌어요. 그래서 같이 놀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저한테 자기 자전거를 500원에 주고 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500원을 주고 자전거를 사서 신나게 온 동네를 쏘다니면서 몇 개월을 타고 놀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바퀴에 구멍이 나서 자전거를 고치러 자전거포에 가서 앉아 있었어요. 그 앞에는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당시에 한쪽엔 새로 생긴 빌라 상가와 많은 판자촌, 다른 쪽은 이제 막 생긴 아파트 단지였어요. 사실 지금으로 치자면 이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은 다른 쪽 아이들과 같이 안 노는데 저는 중간에서 양쪽에 섞인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파트 단지에 살던 어떤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오더니 제 자전거를 보고 네가 훔쳤냐며 막 혼을 내는 거예요. 저는 가위눌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데, 당시 자전거포 아저씨가 대신 해결해 주시고 저는 자전거를 뺏기고 집에 왔던 기억이 있어요. 어렸을 때는 판자촌이 뭔지, 집이 뭔지, 경제 개념이 전혀 없으니까 이 친구가 왜 자전거를 나한테 팔았는지… 이런 개념이 없었는데 나중엔 그 생각이 자주 나더라고요. 그리고 당시에 이 일대의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이 성남으로 갔다고 후에 얘기를 들었어요. 지금도 가끔 성남 일대를 지나가면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컸을까, 지금은 굉장히 부자가 돼서 잘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 이런 식으로 제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부동산이나 도시 개발에 대한 정책적으로 많은 지점이 얽혀 있어요. 그때 올림픽과 동시에 송파구가 신도시처럼 생겼어요. 그러한 변화 속에서 제가 송파구에 들어왔던 거고 그때 밀려난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 때 저한테는 그 장면이 한국 부동산 개발사를 한 장면을 집약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전 몇 년 전에만 해도 ‘집을 사서 내 집 마련을 해야겠다.’ 이런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부동산에 대해 전혀 몰라서 청약이 돼야만 집을 살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파트 청약을 넣으려고 위례에 살기 시작했어요. 제가 청약을 넣으면서부터 청약 광풍이 불고 집값이 갑자기 올라갔어요. 예를 들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우 지난해 부동산 사장님께서 저보고 얼마에 집을 사라고 하셨어요. 근데 그로부터 6개월 만에 집값이 6억이 더 오른 거예요. 작년 한 해에만요. 제가 안정된 직업이 아니다 보니 집을 굉장히 갖고 싶었어요. 집이라도 있으면 삶이 좀 안정이 되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집을 갖고 싶다는 게 희망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욕망이었어요. 근데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청약이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은 없고, 집값은 불과 2~3년 전보다 몇 배는 더 있어야 하고, 다 닿을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거예요. 제가 진돗개를 키우는데 개와 산책하다보면 주변 이웃과 쉽게 친해지거든요. 어느 날엔 진돗개를 키우는 어떤 분과 우연히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게 됐어요. 제가 아파트 청약이 다 떨어져서 ‘강아지 데리고 둘이 시골 가서 살고 싶다. 청약에 희망이 없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저를 보면서 “무주택자세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 질문이 너무 희한한 거예요. 무주택, 유주택, 다주택자세요? 이런 단어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쓰질 않았잖아요. 그래서 그 질문이 저한테 인상적이었어요. 생면부지의 모르는 사람이 제게 아주 내밀한 질문을 굉장히 순진하게 물어보는 거니까. 그 기억이 저에겐 오래 남아 있었어요. 집에 대해 불안한 게 나뿐만이 아니고, 무주택자와 유주택자 같은 단어가 마치 일상적인 단어이면서 동시에 계급을 나누는 것으로 사용되고, 사람을 나누게 됐죠.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작년에 기획했지만 지금 더 문제가 심각해졌단 생각이에요. 부동산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많이 흔드는가, 이렇게까지 부동산이 불안정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런 단어를 쉽게 쓰지 않았을 거고, 모든 사람들이 집을 갖기 위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에 자기 삶을 더 잘 살 텐데. 저는 거주의 불안 때문에 내가 너무 많은 걸 잃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 질문이 제게 트리거가 되긴 했지만 제 고민과 맞닿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기도 해요. 지금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그래서 굉장히 많은 인터뷰를 했고 시민들이 보내주신 설문 답변을 보니 제 생각과는 다른 집에 대한 고민과 또 집에 대한 철학과 사유와 감정들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참여해주신 시민 분께 정말 감사하고 배우는 게 많았어요.
장소와 공간의 이동이 갖는 의미가 있나요?
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성을 많이 생각해요. 공간과 장소의 이동이 시간의 밀도를 바꾸는 느낌? 딱 한 가지 의미로 정의하기보다는. 예를 들어 제가 낯선 장소에 갔을 때 처음 3일이 굉장히 길고 그다음 3개월이 길고, 그 후의 1년은 처음 3일, 3개월과 거의 같은 밀도를 가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익숙함 때문에 그럴 거예요. 어떤 분들은 성장을 얘기해 주시는데 저는 성장보다는 차원이 달라지는? 번번이 시간의 밀도가 달라지는 걸 느끼면서 저는 조금씩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3년 전을 떠올리면 이전의 생 같아요. 지금의 제가 아니라 전생의 저 같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기관 같아요. 제 몸의 장기 같은 느낌? 그래서 집이 조금만 불편해도 마치 몸이 아픈 느낌이에요. 그래서 제겐 집이 잠만 자고 나가는 공간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집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에요. 집을 관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동이 필요하고 자본과 세금이 많이 필요해서 낭만적인 느낌보다는 끊임없이 관리하고 움직여야 하는 기관 같아요. 하지만 정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저의 일부입니다.
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나요?
작년까지만 해도 하남에 부모님 사업체가 있어서 저희 강아지도 그곳에 단독주택에 살 때 데리고 왔어요. 넓은 땅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거예요. 서울에 살지만 언제든 그곳에 가서 산을 보고 하늘 보고 이런 게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작년에 부모님께서 은퇴하시면서 그 땅을 정리하셨어요. 그 장소는 저와 따로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공간인데 없어지니까 저한테 가장 중요한 게 땅이 된 거예요. 내 공간에서 땅을 밟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현시점에서 중요한 기준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한창 주택 매매를 알아보러 다닐 때 어느 순간 아파트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투자 목적보다 내가 이곳에 살면서 땅을 밟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늘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집에 대한 고민 및 계획이 있나요?
집을 살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어요.
살고 싶은 지역이나 집이 있나요?
현실적으로 송파나 강동에 저만의 집이 있고 경기도에 전원주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강아지가 신나게 달리기를 할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은 아무래도 서울에서는 힘드니까요. 올해 안에 주택을 지을 계획도 있어요.
3년 후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이 질문은 작품 설치기간이 3년이어서 만들게 된 질문인데요. 이 질문을 만들면서 문득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나는 뭘 했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됐는데 거의 처음 쓴 소설로 당선이 돼서 등단이란 걸 하게 되고,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모르는 분야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저는 등단을 하고나서 그전에 하던 모든 일을 관두고 딱 3년만 열심히 해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글만 썼어요. 그 3년의 마지막에 장편 소설을 썼어요. 그걸 쓰면서 아니, 하던 일을 관두고 소설만 쓴 3년이 제겐 굉장히 힘들었는데 어떤 보상도 없이 열심히 한 시간이었어요. 그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에요. 전 그걸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은 평가를 받거나 받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떤 시간은 아주 나중에 비추는 별빛처럼 한참 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힘든 시간도 후에는 빛을 발할 수도 있지 않나? 왜냐하면 그때 제가 쓴 이야기가 지금 이 작품처럼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거든요. 그래서 3년 후의 저는 그다음 3년 후를 위해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